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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매춘굴이었던 워커힐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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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아르파마 작성일 19-02-07 13:0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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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이후 정치 자금 마련이 시급해진 박정희 정권은 정치 자금 마련이 시급해졌고, 정치 자금원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무의미한 건설 사업을 벌여 공사비를 착복 하는 것이었다.
공사판을 벌이기 위한 명분을 찾기 위해 골몰하던 군사정권은 마침 당시 미군들이 휴가때가 되면 휴양지를 찾아 대부분 일본으로 여행하는 것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엔 이렇다할 윤락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휴가를 맞이한 주한 미군들은 한국에 남아 달러를 소비하는 대신 일본 등 해외로 나가 달러를 소비하였다.
미군은 미군 나름대로 비용이 많이 들었고, 한국 정부도 정부 나름대로 미군의 달러가 자국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해외에서 소비되는것에 못마땅해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부 는 외화벌이의 명분을 내세워 윤락시설을 구상한다.
윤락시설의 이름은 한국군 운전병의 실수로 죽은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이름을 따서 워커힐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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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정부의 워커힐 공사 계획이 발표되자, 62년 봄 , 일본의 주간지 들은 앞 다퉈 “한국의 군사정권이 미국 장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술과 여자와 도박판 위주의 위락시설을 짓고 있다.” 고 보도했다.
미국 언론 도 62년 10월, “이 시설은 매춘굴, 카지노, 미인 호스티스 등을 갖추고 있다” 고 보도했으며, 이에 미국 부인단체가 유엔군 사령부와 한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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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워커힐은 원래 목적인 미군 장병 유치에 실패해 적자경영을 면치 못하며, 그 대신 박정희가 기생 파티를 위해 자주 이용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부터 윤리적 문제가 대두되었던 워커힐은 1961년 9월 부터 착공에 들어가 11개월만인 62년 12월 26일 완공이 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워커힐의 공사 과정과 공사에 투입된 비용에 있었다.

1961년 9월, 군사정권은 워커힐을 짓기 위해 성동구 광장동 부지 18만평을 수용했다.
이때 워커힐 부지는 원래 '대한전선그룹'으로 유명한 설경동 회장의 땅이었다.
그는 당시만 해도 10대 재벌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을 앞세워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은 국가 명의로 설경동의 부지를 헐값으로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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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 건설사업에는 중앙정보부의 석정선(중앙정보부 제 2국장), 김용태(중앙정보부 경제고문) 등이 개입했다.
이들은 교통부가 워커힐 건설을 주관토록 조처했는데, 교통부 장관 박춘식 은 워커힐 건설공사가 자금난으로 부진해지자 워커힐 이사장인 임병주(당시 중앙정보부 제2국 1과장, 중령)에게 정부주식 출자금 5억 3천 600만원을 건설자금 명목으로 빌려주었다.
정부가 아직 공사에 드는 비용도 책정되지 않은 시점에 가불 형식으로 거액을 빌려 준 것은 야당 의원들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건설을 위해 투입된 비용은 2억 8천만 원(220만 달러)에 불과 했으며, 이는 형무소 죄수들과 각 군의 공병들의 무상 노역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부족한 장비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에서 지원 받아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워커힐 공사에 필요한 일본제 수입품에 대하여 관세를 물지 않았는데 , 그렇게 무대 장치로부터 시멘트에 이르기까지 일제품을 수입하면서 중앙정보부는 무관세 무검사로 도입하여 150만달러(2억여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
그런 까닭으로 애초 서울대 공대 교수나 외국 건축가들이 800만 달러에서 1000만 달러가 소요될 거라고 예상한 워커힐 건축을 불과 220만 달러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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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는 4,158대의 각종 장비와 연인원 24,078명을 무상 노역 시켰으며, 건설비 명목 으로 책정한 5억 3천 600만원 중 실제 공사에 투입된 2억 8천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2억 5천여만원(현재가 약 10조원)을 착복했다.
참고로 1963년도 한 해 국가 예산이 768억원이었다.
매춘굴을 짓는데 한 해 국가 예산의 0.6%인 5억원의 거액을 투입한 것이니,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0조원 을 투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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