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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와앙 작성일 19-08-15 21:3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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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다구치 렌야



업적 1.

부대장으로 있던시절 부하병사한명이 화장실에 가서 인원수가 비자 중국인의 소행이다

라며 아무런 권한도 없으면서 중국군에 공격명령을 내림. 중일전쟁의 신호탄을 쏜 장본인!


업적 2.

일명 징키스칸 작전 "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이 떨어지면 필요없어진

소나 말을 잡아먹어라 " 라는.. 전쟁역사상 희대의 명언과 함께 보급 작전 실행!


하지만 소와 말에게 사료를 주지 않아서 이동중 소와말이 대부분 폐사

강으로 이동중 말들은 강에 떠내려가고 산으로 이동중 소들은 절벽에서 떨어짐.


단순히 이동하며 아군에게 보급을 하는일이 었으나 보급 실패. 일본군 물자부족 대 참패.


업적 3.

"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 쓰냐? "

영국군은 정글에서 비행기에 물자를 담아 쏟아부었으나. 일본은 보급못함...


보급부족으로 일본군 대 참패


업적 4.

"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

이동도중 절반은 굶어 죽고 다시 그절반은 연합군에 투항함. 싸우지도 못하고 전멸.



업적 5.

전쟁 역사상 손가락에 꼽히는 임팔 전투의 사령관.

렌야 독립투사의 최대업적.


일본군은 아라칸 정글이라는 헬게이트라 불리는 정글을 뚫고 진격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15일간의 보급물자면 충분하다며 작전을 실행. 모든 일본 장군이 말림.


하지만 렌야 장군은 그대로 작전을 실행!

일본군은 영국군이 나타나면 배가 고파 도망치기 바뻣고 풀과 뱀을 잡아먹으며


15일간의 보급물자로... 정글을 빠져나오기 까지 90일이 넘었음.

심지어 상대는 영국군에게 고용된 전설의 용병부대 " 구르카 전사단 "


구르카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장본인. 일본군은 죄다 썰려나가고 뼈도 안남음.

10만 대군을 데리고 진격하였으니 돌아온건 13000명. 이중 ㅄ이 아닌사람은 3000명도 안됨.


전쟁역사상 흔히 볼수없는 대 전멸.


업적 6.

8월 15일 일본 패망후 일본군의 장성들은 모두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무라구치 렌야는 연합군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한 이유로 혼자 무죄 석방됨.


심지어 모든 일본인들이 자행했던 학살을 무라구치 렌야는 단한번도 실행한적이 없음.

무고한 적들에게 절대 학살은 커녕 학대도 하지않으며 적에게는 따사로운 인품있는 장군이었음.


장군으로 있으며 수많은 전투를 치루는동안 처지한 적군의 숫자보다 할복시킨 일본 군인의

숫자가 2배이상 더 많음... 일본 전체 군인의 10%를 싸우기도 전에 굶어 죽엿으며


그 이상의 일본군인들을 사지로 밀어넣음.

연합군에서는 연합군 승리의 주역중 한명으로 취급함.


한국에선 독립운동가로 취급. 1966년까지 일본에서 잘먹고 잘살았음.

죽기전에 그가 남긴 한마디는 일본인들을 경악케 함.

"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전부 내 부하 탓이지... "

그는 잔혹행위에 대한 전범용의자로 체포되어 재판을 위해 싱가포르로 압송되었으나, 그의 무능때문에 오히려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힌 점이 감안되어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그는 전후에도 "부하의 무능때문에 임팔 작전이 실패했다"는 변명으로 일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은 무타구치를 도미나가 교지, 스기야마 하지메와 더불어 삼대오물(三大汚物)이라고 부르며 비난하였다.

사실 이런 무능한 인물이 중장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무 능력보다는 학연, 지연, 인맥 으로 진급을 비롯한 모든 것을 결정하던 일본군 특유의 파벌 탓이었다. 무타구치는 당시 군부를 이끌던 우두머리였던 도조 히데키와 같은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 파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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